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라우치 마사타케 (문단 편집) === [[일본국 내각총리대신|내각총리대신]] 시절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www.weblio.jp/souri18.jpg]]}}} || || 총리 대신 취임 후 || [[1916년]],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에게 찍힌 2차 [[오쿠마 시게노부]] 내각이 뇌물 사건으로 총사퇴하면서 원로들은 데라우치를 새로운 내각총리대신으로 낙점하였다. 이에 데라우치는 6년간의 조선 총독직에서 사임하고 10월, [[일본]] [[도쿄도]]로 건너가 [[일본 내각총리대신]]으로 취임하여 거국일치 내각을 수립했다. 조선 총독 → 총리로 승진한 첫 사례. 여기에 [[원수(계급)|원수]] 칭호를 받고 [[일본 재무성|대장대신]]과 [[일본 외무성|외무대신]]까지 겸임했으니 말 그대로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. 이때 일본사회는 [[다이쇼 데모크라시]]의 분위기가 발흥하면서 정당정치와 보통선거제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으나 데라우치는 연립내각 조각을 철저히 거부하고 미즈노 렌타로, 고다마 히데오 등 총독 시절의 인맥을 중심으로 거국일치 내각을 조각하였다. 하지만 데라우치도 막무가내만은 아니라서 [[하라 다카시]]와 정우회를 중용하여 정우회가 데라우치 내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. 국외 정책에서는 전임 [[오쿠마 시게노부]]가 하던 [[제1차 세계 대전]]을 이어받은 전시 내각으로서 [[독일]]과 전쟁을 이었고, 총리 재직 중에도 조선과 [[대만]], 특히 조선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했다. 하세가와야 그의 부하였을 뿐이니(…). [[중국]]에서 황제병에 빠져 있던 [[위안스카이]]가 사망하고 [[안휘군벌]]의 수장 [[돤치루이]]가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대권을 잡자 그에게 [[니시하라 차관]]을 제공하여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으며 중국의 [[제1차 세계 대전]] 참전을 계기로 [[38식 소총]]을 비롯하여 많은 무기와 참전차관을 제공하였다. 다만 그 대가로 중국의 [[의화단 사건]] 배상금 지불을 5년 유예하고 중국군이 [[톈진]]의 [[독일]], [[오스트리아]] 조계지로 진주하는 것을 허용하는 한편 중국의 관세 인상을 인정했다. 이후 [[호법전쟁]]에도 개입하여 북양정부가 남방의 혁명세력을 진압하는 것을 돕는 등 중국에 대한 이권을 확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. [[1917년]] [[블라디미르 레닌]]의 [[러시아 혁명]]이 일어나고 [[러시아]]가 [[적백내전]]의 혼란에 빠지자, 육군참모총장 우에하라 유사쿠, 참모차장 [[다나카 기이치]], 외무대신 모토노 이치아키 등이 적극적으로 출병 개입을 주장했다. 그러나 [[하라 다카시]], [[마키노 노부아키]],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가 모두 신중론을 주장하였고, 이에 데라우치도 사태를 관망하다가 1918년 들어서 [[우드로 윌슨]] 대통령으로부터 체코 군단의 구출을 이유로 공동출병 제의를 받은 후에야 병력을 파견하였다. 이것이 바로 [[시베리아 출병]]이다. 하지만 7,000명의 병력만 파견하기로 한 것을 12,000명으로 뻥튀기시켰다가 다시 40,000명으로 늘렸다가 곧 70,000명으로 늘려버렸고 중의원이 발칵 뒤집혔다. 나중에 후임인 하라 타카시가 이어받아 원만하게 매듭지었다. [[1916년]]부터 이런 군인스러운 막장 체제를 2년 동안 줄곧 유지한 바람에 [[1918년]]에 이르러서는 전쟁으로 인플레가 나타나 [[경제]]가 [[개판]]이었으며, 식량 분배에 차질이 나자 결국 그 유명한 '[[쌀 소동]]'으로 이어졌다. 데라우치 입장에선 좀 재수가 없기도 한 것이, 당시 데라우치의 건강 상태는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었고 데라우치는 4월에 이미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에게 사임을 요청했으나 씹힌 상태였다. 결국 개판이 된 몸을 이끌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100,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강경하게 진압하는 한편, 정부 소유의 백미와 외국에서 급히 구해온 [[쌀]]을 시중에 저렴하게 풀고 황실과 대기업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이것으로 빈민구제 사업을 하는 등 강온양면책으로 민심을 달래보려 했지만 이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조차도 정당내각이 아니면 사태 수습이 안 된다고 판단할 정도로 일본 사회의 혼란이 심각할 정도라서 결국 사임하고 1년 뒤인 [[1919년]]에 죽었다. 향년 67세.[* 여담으로 이 해에 바로 '''[[3.1 운동]]'''이 일어났다.] 결국 1918년 9월 29일 데라우치 내각은 붕괴되고 다수당 대표인 [[하라 다카시]]를 중심으로 정당내각인 [[정우회]]내각이 조직된다. 이 같은 정권 교체는 1차 대전 결과 형성된 전제군주정에 대한 민주주의 체제의 우위가 세계적 대세가 된 시대상 속에 과거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번벌세력의 정치적 후퇴와 함께 정당세력이 부상하여 [[다이쇼 데모크라시]]로 이어지는 분기점으로 볼 수 있다. 1919년에 진행된 조선총독부 관제개혁 중에는 "데라우치는 관제 개혁을 훼방놓을 것이 뻔하다". 당시 실무자인 육군대신 [[다나카 기이치]], 총리대신 [[하라 타카시]] 등이 이미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쥐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